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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은 아래로 흐른다!

<온다 칼럼> 김효진(평등평화세상 온다 회원)

뉴스99 |

 

“넌 노키즈존에 찬성이야, 반대야?” 

 

최근 심심찮게 들리는 질문이다. ‘노키즈존’을 직역하면 ‘어린이 금지 구역’이라는 의미이다. 주로 가게에서 어린이의 출입을 제한할 때 ‘노키즈존’이라는 문구를 걸어 둔다. 그런데 요즘 노키즈존을 걸어 두는 가게가 많아졌다. 이는 사회적인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가게에서 노키즈존을 걸어 두는 이유가 ‘어린이는 통제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주류를 취급하거나, 어린이에게 적절하지 않는 업체에서 어린이의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당연하다.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어린이는 통제가 되지 않아 영업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출입을 제한한다는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단순히 얌전한 어린이도 있다거나, 어린이만 영업방해를 하는 건 아니라는 등등의 반박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어린이를 통제가 되지 않고 어른을 방해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노키즈존에 찬성인지 반대인지를 묻는 질문은 실제 내가 들었던 질문이다. 나는 “무조건 반대야”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왜?”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덧붙였다. 사회에 사람이 지속적으로 머무는 어떠한 공간이 형성된다면, 그만큼 그 안에서 발생할 불편함도 일정하게 존재한다고 본다. 즉 다수의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이 늘 편하고 좋을 수만은 없다는 의미이다.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공간이라면 이는 어쩔 수 없다. 그 불편함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불편해야 한다. 그런 시선에서 노키즈존이란 그 불편함을 어린이와 그 보호자에게 주는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출입을 거부당해 다시 돌아가야 하는 데서 오는 실망감 등의 형태일 것이다. 그것은 가게 안에서 어린이가 실수하면서 주변어른이 느끼게 되는 불편함을 대신한 것이다. 나는 어린이에게 그런 불편함을 주면서까지 편해지고 싶진 않다. 이런 답을 들은 상대가 내게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러면 네가 사장이라고 생각해봐. 어린이 손님이 와서 값 비싼 매장 물건을 망가뜨렸어. 혹은 매장 내에서 소변 실수를 했어. 손님들이 인상을 찌푸리는데도 보호자가 어린이를 돌보지 않아. 그래도 노키즈존에 반대야?” 

 

당연히 반대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조금 멈칫했다. 사장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업장에 피해가 되는 일을 겪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납득이 간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질문이 불쾌했다. 어린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그런 일이 발생할 수는 있겠지만 어린이 손님이 올 때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그 가정이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상황을 가정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아가 어린이라는 존재를 그렇게 낙인 찍어서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애초에 우리는 왜 어린이가 저지른 실수를 유독 참지 못할까? 나는 불편함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에도, 그 불편함이 약자로부터 발생했을 때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함은 아래로 흐른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편함은 누군가 감당하지 않으면 약자에게 향한다. ‘아래’라 표현했지만 어린이가 어른보다 낮은 존재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어린이는 어른보다 약자인 것이 사실이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라고 낙인 찍는 것은 어쩌면 사회가 그걸 허용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회적 낙인을 개개인이 비판적 사고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낙인이란 개개인에게 영향을 주면서도, 개개인의 생각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라는 말은 적어도 어른이 어린이에게 불편함을 주면서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노키즈존은 사장의 재량이다. 사실 사장에게 불편함을 감당하라고 하기도 참 모호하다. 그게 해결책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전문가들이 노키즈존은 어린이 교육에 좋지 않다고 말하지만 잘 와 닿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사회 전체가 어린이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은, 적어도 지금의 사회에선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 따라서는 어린이의 미래를 위해 본인이 손해를 봐도 참으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내게 피해를 주는 존재’라는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어떤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다. 따라서 노키즈존인 매장을 불매를 하거나, 노키즈존에 반대를 한들 제자리일 것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어린이를 인식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 우리는 어린이의 실수에 더 크게 분노하는가? ‘노키즈존’ 논쟁이 시사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