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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길을 걷다 마주쳤던 건설노동자들에 대해 - 건설노동자 양회동님을 애도하며

<온다 칼럼> 윤유진(평등평화세상 온다 교육팀장)

뉴스99 |

 

당신은 길을 걷다 마주친 적이 있다. 안전모와 조끼를 입고 목덜미에 땀에 젖은 수건을 걸고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바로 당신이 살거나 이용하는 공간을 짓는 건설노동자들이다.

 

대학 시절 방학을 지나고 만난 동기 녀석이 구릿빛 얼굴과 근육이 잘게 잡힌 팔뚝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한 달 동안 공사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했다면서, 뿌듯한 얼굴로 어느 상가의 어느 계단은 자기가 만든 거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겪은 건설노동의 엄청난 노동량과 현장의 위험함, 그 속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일을 해내는 선배 노동자들의 숙련성에 대해 얘기했다.

 

언뜻 생각해도 건설노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위험이 산재한 현장에서 무거운 건설자재와 부대끼는 중노동이고, 각종 중장비와 건설기술을 동원해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숙련노동이다. 그런데 현실은 건설노동자의 87.4%가 일용직(1일 단위로 고용되어 일당을 받는 고용형태)이고, 94.3%가 평균 근속기간 1년 미만이라고 한다.(2022 통계청, 건설근로자공제회 조사결과) 공사가 끝나면 실업자가 되는 일상적 고용불안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만드는 숙련노동자들이 왜 일용직으로 일할 수밖에 없을까? 주된 이유는 건설사가 비용절감을 위해 건설노동자를 직고용하지 않고 다단계 하도급(하청)을 주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종합건설사에 직고용되어 있었던 건설기계 노동자들도 IMF 외환위기 이후 외주화되어 일용직·비정규직이 되었다. 그 결과 건설노동자들은 기업들이 만든 다단계 하청 구조의 말단에서 불법 하도급 중계자인 팀장(오야지)이나 인력사무소를 통해 일용직으로 고용되는 것이 당연한 ‘관행’처럼 되어 버렸다.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기형적인 구조 속에서 건설노동자들은 고용불안과 산재위험, 저임금 등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수없이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건설노동자의 특성을 생각하면 건설노조가 사측(공사가 예정된 현장)에 노동자의 고용을 요구하고 최소한의 임금과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협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당연스런 노조의 활동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불법’, ‘강요’, ‘폭력행위’로 규정하며 검찰을 동원해 탄압을 시작했다. 불법이라면 불법 하도급, 임금체불, 안전규정 위반 등 기업 측의 불법행위가 더 공공연하고 심각하다. 그런데 ‘불법행위 근절’을 외치는 정부의 칼날이 기업들에게는 전혀 향해 있지 않고, 하루하루 생계를 고민하는 건설노동자들만을 향해 겨눠져 있다.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대통령이 나서서 ‘건폭’이라는 말까지 쓰며 건설노조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 윤석열 정부에서 노동조합은 때려서 없애야 할 ‘적’으로 상정되어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정부가 모욕적인 말과 무리한 검찰수사로 노동자들을 낙인찍고 언론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쓰기 하며 퍼뜨리는 동안, 건설노동자들은 구체적인 삶을 가진 인간으로서 얼굴이 지워지고, 목소리가 가려지고, 타자화 되었다. 건설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불안정한 상황을 견디고 있는 동료 시민에서, ‘뭔가 위험한 불법집단’, ‘건폭’이 되었다.

 

권력은 이런 ‘갈라치기’를 통해 어떤 사람들을 우리와 다른 존재인 양 비춰지게 한다. 때로는 ‘평범한 시민’과 ‘불온한 노동조합’을 갈라치기 하고, 때로는 ‘무고한 노조원’과 ‘악독한 노조 간부’를 갈라치기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의 건설노동자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여 삶을 던졌다. 노동절 아침이었다. 사람들의 오해 속에서 검찰의 폭력을 맞닥뜨렸을 때, 조합원들의 일자리를 위해 애쓰던 성실한 노조활동가이자 건설노동자 양회동 씨는 얼마나 억울하고 절망스러웠을까.

 

우리에게서 양회동씨를 갈라놓았던 말들처럼, 나와 누군가를 분리하고 타자화시키는 말들은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이런 말들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단순하다. 누군가를 규정하는 말에 의문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왜 거친 목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들어보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어둠 속의 희망>이란 책에서 “거리와 차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연대”를 통해 착취에 대항하는 새로운 저항이 가능하다고 썼다.

 

나의 경계를 넘어 다른 이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세상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편가르기 하는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 나아가 파편화된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들 사이의 거리와 차이를 가로지르는 연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권력이 우리를 갈라놓고 싶어 하는 만큼, 연결된 ‘우리’의 힘은 강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