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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도 기한이 있나요?

<온다 칼럼> 김송미(평등평화세상 온다 대표)

뉴스99 |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고 나면, 주변의 죽음들이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나에겐 아빠의 죽음이 그러했다. 아빠가 떠난 후 세상의 모든 죽음이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나는 아빠의 죽음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3일 안팎의 죽음의 절차들을 처리해 내기에 바빴고, 집에 와서야 아빠가 떠났다는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60여 년의 인생을 살아간 아빠의 삶을 단 일주일 만에 정리해야했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야 했다.

 

아빠가 떠난 8년 동안, 나는 매일 아빠를 생각한다. 아빠와 비슷한 체격을 가진 이를 보면서, 아빠와 함께 갔던 장소에서, 즐겁고 슬픈 일들의 모든 순간에서 아빠를 기억한다. 아빠는 죽었지만, 내 안의 아빠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는 내가 가까이서 느낀 첫 사회적 참사였다. 억울한 죽음이었다. 구할 수 있었지만 구하지 않았고,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304명의 사람, 그들과 함께 살아간 이들의 삶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과 우리들의 슬픔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언제까지 슬퍼할 거냐’는 애도와 기억의 기한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처벌 없이 시간이 흘렀고, 원하는 만큼 애도하고 제대로 기억하지 않은 결과,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회적 참사는 계속 반복되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참사가 일어나고, 국가 애도 기간이라는 게 생겨났다. ‘언제까지 슬퍼할 거냐’는 물음을 국가가 나서서 만든 것이다. 이쯤 슬퍼하면 일상을 살아가도 된다는 것일까. 무슨 자격으로 그런 기간을 설정한 걸까. 국가가 만들어낸 애도의 기간이 끝나고 온갖 혐오들이 판을 치고 있다.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할 때 혐오는 더 강력해진다.

 

서울 한복판에서 그저 축제를 즐기러 온 이유밖에 없는 158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 죽음에 책임져야 할 이들이 책임을 미루는 동안,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동안, 이태원참사로 친구를 잃은 10대 생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태원참사 희생자가 159명이 되었다. 이게 나라인가.

 

기억에 기한을 두는 사회는 얼마나 최악인가. 우리 사회는 심지어 기억을 돈으로 가리려고 한다.

 

최근 ‘일제시기 강제동원 된 피해자들에 대한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정부는 ‘제3자 변제 방식’을 해법으로 내놓았다. 이는 당사자들인 일본정부·기업이 아닌 우리나라 기업이 모은 돈으로 배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분들이 어려운 투쟁을 계속해서 이어온 이유가 돈이었나. 피해자분들은 일본정부·기업의 사죄를 받고, 역사를 제대로 기억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돈만 주면 해결된다는 식의 방법을 해법이라고 내놓았다. 이는 피해자들에 대한 모독이며, 일본 눈치만 본 결과다.

 

기억에는 기한이 없다.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굳이 기한을 둘 수 있다면, 그건 피해 당사자만이 둘 수 있다. 그 기한은 제대로 된 애도와 사과,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을 때만이 가능하다. 누구도 그 기억을 멈추게 강요할 수 없다.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싸워가고 있는 이들 덕분에 우리 역시 누군가를, 삶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의 기억투쟁에 우리가 함께해야하는 이유다.